2013.11 본명 김남기(1946년 9월 27일 출생) 3남 4녀 중 장남. 전남 목포 태생 172cm.아내 강정연(80년 결혼 재미교포), 자녀 1남 3녀 목포북교초등학교. 서울 경복중 목포고 한양대 연극영화과. 1968년 해병대 입대. 1969년 7월 파월71년 6월 30일 제대.목포남일정미소 사장.남일정유소 사장. 몽땅정미소 사장.
▶캐리어 65년, 소울 플레이보이로 데뷔. 65년 울려고 내가 왔나. 66년 가슴 아프게 66년 영화 형수 출연
▶가요우수. 사랑합니다. 별아, 내 가슴에. 미워도 다시 한 번. 하야시와 함께.그대여 변하지 말아요. 지금 그 사람은. 배가 고프다.
▶ 영화의 형수. 가슴이 아프다. 울려고 내가 온 거야? 별아, 내 가슴에. 사랑은 파도를 타고. 지금 그 사람은. 그리움은 가슴마다. 저 언덕 넘어. 친구. 흑산도 딸.
1975 영화 가수왕
내가 영화 음악을 그렇게 많이 만든 건 아니야. 그렇다고 문외한도 아니다. 바쁘게 활동하던 70년대 전후 뮤지컬 영화도 2편 만드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1968년 조영남, 트윈폴리오(송창식, 윤현주), 남진 등 당대 유명 가수들이 모두 출연한 김은천 감독의 ‘푸른 사과’가 첫 작품이었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다. 감독님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양반이라 호흡이 잘 맞았다. 그는 내가 만든 음악은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에 반영했다. 첫 작품이라 지금도 잊을 수 없다.(신준형 남기고 싶은 이야기 중앙일보)
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가요계를 평정하며 슈퍼스타로 군림했던 남진. 동시대의 또 다른 슈퍼스타 나훈아와는 숙명의 라이벌 싸움으로 팬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릴 만큼 잘생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경쾌한 리듬은 그를 친형부대의 원조로 가요사에 정착시켰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그는 영화배우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제14대 가수분과 위원장과 연예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남진은 제5대 국회의원, 호남매일신문 사장, 방앗간 사업을 하던 갑부 사업가 아버지 김문옥씨와 어머니 장기순씨의 부유한 가정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1946년 9월 27일 전라남도 목포 남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는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 그의 꿈은 가수가 아니라 영화배우였다. 목포 북교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경복궁중을 졸업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목포고에 입학했다. 당시 세상을 뒤집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그도 반해버렸다.
가족 몰래 가수가 되겠다는 마음을 안고 상경했다. 작곡가 한동훈의 픽업으로 남진이라는 예명으로 64년 12곡을 취입해 데뷔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했다. 당시는 현미 한명숙 최희준 등 허스키한 목소리의 가수들의 전성시대. 부드러운 음색의 남진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인 가수 활동도 하지 못해 공백기를 맞았다.
고교 졸업 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외국 팝송을 즐겨 들었던 대학생 남진은 취미로 학내 공연에 참여했고 외부 공연장도 빼놓지 않았다. 우수한 외모의 그는 그룹 미팅 진행자로도 활동할 정도로 여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이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아들을 못 본 어머니는 “어차피 할 테니 최고가 되라”고 정성껏 보살폈다.
1년 뒤인 66년 12월 김영광 작곡의 <울려고 내가 왔나 오아시스>를 내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이 앨범은 보름 만에 7,000장이 팔리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블루스, 트로트, 왈츠, 차차차, 트위스트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선보이자 각 음반사와 쇼단체들로부터 치열한 스카우트전이 펼쳐졌다. 연기 공부를 한 그는 무대 위에서 의상 콘셉트와 노래에 어울리는 독특한 몸짓을 개발해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갔다.
67년 1월 주목받는 신인가수로 시민회관에서 열린 연극영화상(한국일보 주최) 시상식에서 초대 가수에 올랐고 1967년 MBC방송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며 젊은 여성들의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려고 내가 왔나’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67년 3월 전속사를 지구로 옮겨 발표한 박충석 작곡 ‘가슴 아파’는 그의 확실한 출세작이 될 정도로 연타석 히트를 기록했다. 한 달 만에 남진은 이미자를 제치고 전국 음반 판매 성적 1위에 오르며 4월 최고 가수로 선정됐다. 이 곡은 또한 최고의 인기곡으로 선정되었다. 연기를 전공한 우수한 외모의 그는 자신의 히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 등 동명의 영화뿐 아니라 ‘형수’ 등 수많은 영화에 주연배우로 발탁돼 영화배우의 꿈도 이뤘다. 관심거리가 된 남진에게서는 수많은 여가수, 배우들과의 스캔들도 양산됐다.
베트남 복무 당시 고국으로 위문공연을 온 후배 여가수 조영희(가운데 흰 원피스 차림)와 기념사진. 1968년 남진은 해병대에 입대했다가 69년 7월 베트남에 파병됐다. 2년간 북부 호이안에서 마이크 대신 M16 소총을 든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2소대 소총수로 싸웠다. 당시 청룡부대에는 남진 외에도 진성남 이명진 태원 등 3명의 가수가 더 있었다. 1969년 베트남 장병 남진은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 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군 복무로 인한 2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구레코드는 남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70년 4월 청춘 파도의 블루스 등을 수록한 신보를 발표했다. 이 시기 그의 최대 라이벌로 등장한 나훈아는 최고의 인기가수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한 남진은 11월 신보 ‘사랑이 스친 상처’를 발표하며 나훈아의 ‘두 눈물’을 제치고 가요차트 정상에 올랐다. 가요 사상 최대 라이벌인 남진, 나훈아 대결의 서막이었다.
71년 6월 남진의 제대에 맞춰 지구와 오아시스 사이에선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고 동향 인기가수 조미미미와의 약혼설도 불거졌다. 뜨거운 인기의 반증이었다. 공식 복귀 무대는 지난 7월 TBC TV <쇼쇼 남진아워>. 빠르게 컴백 신보 앨범 ‘마음이 약해서’도 발표했다. 전역 3개월 만인 9월 ‘귀국 리사이틀’이 시민회관 무대에서 열렸다. 남진의 리사이틀은 불황을 깨는 것은 물론 당시 뉴웨이브 음악인 포크, 록 등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트로트의 부활을 꿈꾸게 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사흘 뒤인 71년 9월 22일 방송가요대상에서 그는 남자 가수상의 영예를 되찾고 최고 가수가 됐다.
이에 나훈아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지난 10월 2일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누가 관객 동원에서 승리하느냐가 당시 대중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나훈아도 매진 사례를 이루며 두 사람은 호각세를 보였다. 당초 3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남진을 누르고 나훈아가 가수왕에 선정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남진이 71년 MBC 가수왕에 올랐다. 이후 두 사람은 언론의 부채도 한몫했지만 사상 유례없는 과열 경쟁으로 가요계를 뜨겁게 달궜다.
경쟁가수의 대명사 텅빈 자세로 꾸준한 활동
첫 리사이틀에 이어 1972년 초 열린 두 사람의 리사이틀 재대결은 장군 몽궁식으로 이번에는 나훈아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인기 경쟁이 과도해지자 노래보다는 묘기까지 선보이는 무리를 하기도 했다. 시민회관 KBS 가수 정백종. 남진, 나훈아 양측은 서로 꽃다발 공세, 화환 수를 늘림으로써 인기를 끄는 것은 기본이며 무대에서 여성 팬들과 키스신까지 연출했다. 방송 때는 남진, 나훈아에게 등장할 때만 소녀 팬들의 외침이 이어졌고, 다른 가수들의 무대는 차가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등 부작용도 심각했다.
결국 라이벌 관계는 지구와 오아시스 레코드 회사 간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사고가 난 것. 그해 6월 남진의 팬을 자처한 김은철은 사이다병을 휘두르며 나훈아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의혹의 눈은 아팠지만 결백함을 주장한 남진은 이 사건으로 가수분과위원회에서 제명 위기를 겪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맛없는 일도 많았지만 남진, 나훈아의 사력을 다한 경쟁은 후배 가수들에게는 의욕을 주고 불황에 시달리는 대중음악계에는 팬들의 관심을 끄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은 70년대 내내 팬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1972년 10월 미국 공연에서는 오색창연한 빛이 배터리로 작동하는 25만원짜리 사이키델릭 무대복을 구입했다. 이 옷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호놀룰루 공연 때 선보인 무대복 같은 디자인이었다. 1973년 제3회 리사이틀에서는 이 무대 복장으로 등장해 동양의 프레슬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해 TBC 방송가요대상은 그의 것이었다. 그는 71년 한국무대예술대상, 71·72·73년에는 MBC가 주관하는 가수왕에 올랐고 67·71·72·73·74·75년에는 10대 가수상 선정 등 70년대 중반까지 화려한 수상 퍼레이드를 벌였다. 1972년에는 7천 명 규모의 팬클럽을 결성하였고 이듬해 5월 남이섬에서 야외 축제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그의 팬클럽은 박수부대, 대량 희망곡 엽서부대로 일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남진은 극성 여성 팬들의 등줄기에 늘 시달렸다. 꽃다발 공세는 기본이고 목에 매달려 키스를 하려다 몸의 일부를 만지고 잡히는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숙소에 속옷 차림으로 들어오는 여성 팬들도 있었다.
남진의 전성기 당시 히트곡은 대부분 박춘석과 전두수의 합작. 박충석 씨는 의리가 강한 남진을 누구보다 아꼈다. 이들 히트곡 제조 트리오는 동아방송에서 처음 만났다. 1974년 1월 음반계의 혁명이 일어났다. ‘박충석 프로덕션’의 탄생이 그것. 남진은 이미자 등과 함께 스승 박충석, 정두수씨를 따라 대도 레코드 회사로 둥지를 옮겼다. 이때 남진은 음반이 팔리는 숫자대로 개런티를 받는 국내 최초의 인세 가수가 됐다.
1975년 4월 경남 창영군의 대한극장 공연 때 7명의 여성 팬이 산에서 진달래꽃을 대량으로 꺾어 꽃다발을 만들고 산림법 위반으로 입건되는 사건이 화제가 됐다. 75년 11월에는 나훈아를 폭행한 김은철이 이번에는 자신을 덮치는 낭패를 봤다. 이후 김은철은 5년 뒤 목포 남진의 집에 불을 지르며 굳은 악연을 이어갔다.
75년 9월 열애설이 나돌던 가수 윤복희와 약혼 6개월 만에 파혼 선언, 두 달 만에 다시 동거에 들어가는 곡예 같은 생활로 관심을 끌었고 결국 2년 만인 77년 11월 정동교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1977년에는 오아시스로 전속을 옮긴 후 윤복희, 윤한기와 가족쇼단을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1978년 10월 대전시민관 개관 17주년 기념 남진윤복희 쇼 춤추는 함대 공연 때 또 사건이 일어났다. 술에 취한 남성 팬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하자 화가 난 남진이 객석으로 뛰어내려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힌 것이다. 불행의 전조였을까. 3년 7개월의 부부생활 동안 자녀가 없던 남진과 윤복희는 79년 3월 결국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1980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중앙교회에서 재미교포 강정연과 재혼해 식품점을 운영했다. 3년 뒤 귀국한 남진은 박춘석의 주선으로 신보 ‘빈잔’을 발표했고 84년에는 목포에 하와이 관광 나이트클럽을 오픈,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86년 남진은 신곡 ‘누가 아는가’를 발표했다. 우연인지 나훈아도 비슷한 시기에 신보를 발표했다.
1989년 11월 4일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에서 한밤중 조직폭력배에게 찔려 허벅지를 찔린 뒤 병원에 입원한 남진.1989년 11월 4일 오후 9시 50분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 호텔 카바레에서 공연을 마친 가수 남진(당시 43세)은 일본 연예인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건장한 20대 남성 3명이 몰래 뒤를 이었다. 남진이 벤츠 승용차 오른쪽 뒷좌석에 오르려는 순간 이들 중 한 명이 날카로운 흉기를 가슴에서 꺼내 남진의 왼쪽 허벅지를 깊숙이 찔렀다. 남진은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87년부터 본격 가수 활동에 돌입한 남진은 89년 11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공연을 마치고 나오던 중 20대 청년 3명에게 긴 칼로 허벅지 하단부를 관통당하는 습격을 당했다. 절치부심한 남진은 1991년 가수분과위원회 14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또 92년에는 3년 만에 신곡 바다를 발표했고 94년에는 힐튼호텔에서 가인생 30년을 결산하는 기념 콘서트도 열었다. 98년 7월 조선일보가 조사한 건국 이래 가수 50대 중 10위에 랭크되는 영광을 안았다. 2000년에는 한국연예협회 제7대 이사장에 선출되어 KBS 가요대상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최근 그의 대표곡 너와 함께는 5인조 그룹 칠레에 의해 30년 만에 새롭게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남진은 여전히 전국 투어와 신보 발표를 멈추지 않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저는 음반 홍보를 하지 않는 가수 중 한 명입니다. 텔레비전도 1년에 두세 번만 방송됩니다. 인위적인 히트곡은 방송이 끊기면 1년도 안 돼 사라져 버립니다. 한편, 좋은 노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집니다. 텅 비어 같은 노래는 10년 만에 히트한 곡입니다.(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2021.3
2021.5
2021.5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라마다서울호텔에서 열린 ‘대한민국 예술문화인 대상’ 시상식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