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 영화배우 신영균이 500억원 기부했다.

감사해야 한다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다.영화배우 신영균. 인터뷰 기사 제목은 “500억 기부한 91세 배우 신영균 ‘내 관에 성경만 넣어달라’다.

100년 역사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대배우 신영균.그랬던 신영균이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일부를 기부했다는 소식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죽을 때 관 안에 성경 한 권만 품고 간다는 뜻이었다.감동을 넘어 존경의 마음까지 우러나오는 귀중한 기사였다.

신영균의 삶은 궐기 그 자체였다.한마디로 곧고 과감한 성격으로 버틴 것이다.누구나 그렇게 한 번쯤 살고 싶은, 실제로는 어려운 삶이었다.

저는 좀 재미없었어요. 그래도 원칙 하나만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91세에 이런 고백을 하기는 쉽지 않다.이런 얘기를 하려면 적어도 아내와 아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신연균은 주저 없이 이렇게 얘기하더라. 도대체 신연균은 어떻게 살아왔기에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신영균은 실수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연예인으로 살면서 수도자처럼 지낸 것이다.술과 담배는 물론 여성과 도박도 멀리한 것이다.그러나 문제가 생길 리 만무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에서 태어난 데다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치과의사로 결혼까지 한 상태에서 영화배우가 됐다.그래서 배우가 되는 과정도 남달랐다.운영이 잘되는 치과병원을 휴업하고 영화배우로 나설 때 아내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신영균의 연기 생활은 각별히 시작됐다.학창시절 연극과 공부에 동시에 재능을 보였다.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연극을 선택했다. 당연히 대학 진학은 포기한다.

아이 신영균에 대한 기대가 컸던 어머니는 강하게 만류했다.하지만 신영균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19세의 신영균은 용연과 공부 중 연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열정만 갖고 찾아온 연극계는 미래를 걸 만한 분야가 아니었다.불안하게 연극계를 버틴 신영균은 안정적인 직업의 필요성을 자각했다.그래서 연극을 선택한 열정으로 이번에는 공부를 시작했다.그래서 남들보다 2년 늦게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치과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군의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치고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감사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

연기장을 떠난 지 10여 년.신영균은 평범한 생활인이 된 것처럼 보였다.치과의사가 돼 치과병원을 운영하면서 결혼까지 하며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잃은 것은 아니다.치과의사 생활을 하면서 국립극단에 입단해 연기 활동을 재개한 이유였다.이번에 선택한 연기는 10대 후반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결단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랐다.안정적인 직업과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여가 수준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렇게 연기를 재개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신영균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순간이 찾아왔다.조근하 감독이 제작을 준비 중이던 영화 ‘과부’에서 머슴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안이 온 것이다.거절하는 신영균이 아니었다.자연스럽게 출연이 이뤄져 영화배우가 됐다.

신영균은 매일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다.치과의사로 진료하면서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지켜온 자신에게 영화판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래서 과거 엄마처럼 만류하는 아내를 설득해 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화배우 생활.신연균은 치과의사가 환자의 이를 치료하는 자세로 연기에 몰입했다.항상 완전한 연기가 나도록 일상생활을 청결하게 관리했다.

그래서 신영균의 충무로 영화판 별명은 바른생활남. 화면 속 신영균과 일상생활의 신영균을 철저히 분리했다.신연균은 자신의 연기가 치과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흰 가운을 입는다고 생각했다.하얀 가운을 벗으면 신영균은 자연인 신영균임을 잊지 않았다.신영균은 가정의 행복을 인생 목표의 1순위로 잡았다.

그런 철저함으로 연기에 몰입하자 인기와 명예가 동시에 찾아왔다.각종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고, 그 영화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신영균에게 주연배우상을 안겨줬다.신영균은 끊임없이 고마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원칙을 굳게 지켜나갔다.

그러니 반드시 감사를 표하시오

1928년생인 신영균은 1960년 영화판에 들어갔다.그리고 1978년까지 320편의 영화를 찍었다.한 달에 1.5편을 찍는 고강도 스케줄이었다. 여한이 남은 인생이었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며 추악한 인생 후반기를 맞은 연예인도 많다.신영균은 철저한 자기관리 못지않게 탄탄한 재무관리도 했다.그래서 수 백억원대의 재산을 모았다.이는 신영균이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힘이 바탕이 됐음에 틀림없다.

그런 재산을 신영균은 자녀들에게 남김없이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가족의 적극적인 찬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신영균은 자기관리, 재무관리 못지않게 자녀교육에서도 성공한 것이다.막대한 재산을 앞에 두면 누구나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하지만 신영균 자녀들은 아버지가 숭고한 의지를 결행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과 달리 제대로 베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명보극장을 기부했을 때 정말 기뻤고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어요. 충무로의 흔적을 살릴 수 있었잖아요.”

평생 영화인으로 살아온 신영균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준 영화팬은 물론 동료 영화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영화판에서 번 돈을 영화판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10대 후반, 그리고 30대 초반의 연기를 선택할 때 연기에 갖는 고마움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재산 환원은 그런 고마움을 평생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아이 같은 극장을 냈는데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신영균은 이렇게 답했다.

6070년대에는 제 영화를 실컷 내보내는 극장이 너무 갖고 싶었어요.하지만 이제 욕심이 없어요.다만 마지막으로 내가 가져갈 것은 4050년 된 손때가 묻은 이 성경 하나예요.(딸을 보고) 혜진아, 이걸 나와 함께 묻어줘.”

감사로 삶을 마감하는 신영균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시작이다.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상대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 그러니 꼭 감사를 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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