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다.이름 가져도 될 게 뭐가 있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우는 펭귄인데 내가 너를 못찾을리가 없어. 이름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네가 충분히 알 수 있으니 걱정 마. 긴 밤 99쪽 너는 이제 훌륭한 싸이다.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다.『긴 밤』 중 116쪽의 누구나가 이름 없는 누군가를 사랑해 주는 사람 옆에서 이름을 갖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신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거나 온기를 내는 사람에 의지해 험난한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가는 힘을 얻어 성장한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은 이름 없는 누군가가 태어났을 때 자신에게 남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곁에 내주며 인생의 지혜를 나눠준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가진 자가 그럴 것이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가 아기 펭귄의 부화를 돕고, 그 펭귄이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함께 길을 걸어주는 아름다운 동화 <긴 밤>은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다. 맨 처음 코끼리 고아원에 있던 사이 노든은 결국 고아였다는 뜻이다. 심지어 코뿔소 고아원도 아니고 코끼리 고아원이었다. 그러나 코끼리들의 도움으로 훌륭한 코끼리가 된 노든은 이제 멋진 코뿔소가 되기 위해 세상에 발을 내디뎠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코뿔소 가족을 이루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내와 딸의 행복한 시간은 총을 든 사냥꾼에 의해 짓밟히고 노덴은 동물원에 갇히게 된다. 동물원에서만 평생을 보낸 앙가브와 동물원 탈출을 꿈꾸던 노덴은 친구 앙가브를 잃고 뜻밖의 전쟁의 참화 속에 동물원을 걸어나오게 되지만 그의 동무는 펭귄치크였다.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을 바구니에 담은 채 노덴과 치크는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내며 생과 사의 경지를 넘나든다. 노덴은 자신의 길동무인 치쿠를 잃었지만 어린 펭귄을 새로운 길동무로 삼게 되면서 치쿠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 위해 바다로 떠난다.
주로 스릴러를 읽는 나 같은 사람은 직관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이코패스가 있었다,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형사가 그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범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마침내 범인을 잡는 끝! 그런 이야기 속에 숨은 큰 의미 같은 건 없어. 다만 세상에 나쁜 놈들은 많지만 그런 놈들은 잡아야 한다는 권선징악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글도 많지 않고 그림도 많은데, 게다가 뭔가 찡한 사연이 있는데도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많은 이런 책들은 어렵다. 이 작품에 대해 써놓은 해설이나 심사평가를 읽다 보면 오래 전 중고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이 문장은 이런 뜻이고, 이 문장 속의 이 단어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갖는 어떤 대단한 함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그 두 사람이 함께한 몇 개의 밤이 서로에게 남긴 큰 의미에 대해서만 생각하려 한다. 함께 했고, 서로를 생각하느라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해서만 기억하려고 한다.
쉰 목소리로 거친 노래를 부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깊이 울리는 가수를 보고 킹콩이 뜨개질을 하는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코뿔소와 베이비펭귄의 조합을 보면서 뜨개질을 하는 킹콩을 떠올리게 됐다. 둘은 너무 다르다. 너무 커서 너무 작아. 초원에서 살고 바다에서 살아야 한다. 이미 세상을 오래 살았고, 마침내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그 둘에게 있어서 서로는 전부였다, 그렇게 긴 밤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명확한 대비는 만들었지만, 그것이 억지로가 아니라 감동을 준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이 결국 너무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