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9년. 암흑의 세계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평화로웠던 남부 도시 폼페이우스가 베스비오(Vesuvius) 화산 폭발로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폴리 만을 따라 번성하던 도시 폼페이, 인구 1만 2천 명의 로마제국 도시는 훨씬 더 세상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748년 시작된 고고학적 발굴은 놀라운 일이었다. 화산재에 묻히기 전 폼페이 사람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예술품과 유산을 재 속에서 그대로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화산 폭발로 인한 막대한 열과 심각한 고통 속에서 죽은 수많은 영혼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토론토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 ROM)에서 2015년 6월 13일부터 이듬해 1월 3일까지 ‘폼페이 인 더 섀도우 오브 더 볼카노’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폼페이우스는 화산으로 인한 어둠의 그늘에 묻혀 오랫동안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세계에 있었다. 전시회를 보면서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고대 문명의 꽃이 발현된 도시 폼페이 드라마 같은 슬픈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고대 청동상은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5개가 화산재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위의 청동상도 그 중 하나이다. 그리스 스타일의 드레스페프로스(Peplos)를 입은 여성이 옷을 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발견된 5개의 청동상은 무용수,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성, 종교적인 물품, 그리고 집주인의 딸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여성의 청동상은 79년 화산 폭발 당시 폼페이와 함께 화산재에 잠겼던 도시 헤라클라네움(Herculaneum)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장인 소유의 House of the Papyri 정원 수영장 인근에서 발견됐다.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로마 작가 플리니 더 영거(서기 61~113)가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글로 기록해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남겼다.
“순간 구름이 대지를 뒤덮고…” 우리 뒤로 검은 먹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으며 폭풍처럼 대지 위를 덮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지금 막 재가 떨어지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고 농도가 짙어지면서 더 가까이 우리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불에 타 부서진 부석과 돌이 날아오고 있다. 정원 마당 높이까지 화산재와 부석이 이미 쌓여 있어 조금만 늦으면 탈출이 불가능할 것 같다.”
플리니 더 영어가 남긴 글에는 숨막히는 긴박감이 하나하나 흐르고 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천재지변의 재난 앞에서 플리니 더 영어는 통곡하고 있었다.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긴박하게 일어나고 있는 베스비오 산 주변의 상황을 기록하는 순간 화산은 잔인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베스비오 화산 폭발일이 1979년 8월 24일 낮으로 알려졌지만 여름이었던 8월이 아닌 화산은 날씨가 추웠던 가을에 폭발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발굴 작업을 하던 중 수많은 난로가 발견되었고 난로 안에는 타다 남은 숯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 폭발은 여름철인 8월 24일이 아니라 날씨가 상당히 차가운 가을 무렵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 또한 확실하지 않아 언제 화산이 폭발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다.
화산재 구름이 하늘로 20㎞ 치솟고 폭탄처럼 터지는 부석이 떨어져 평화로웠던 도시 폼페이와 인근 도시를 순식간에 메웠다. 베스비오 산의 화산 폭발은 폼페이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화산 폭발 전에 통상 지진이 일어난다. 1962년 2월 5일 강력한 지진이 폼페이우스를 뒤흔들었고 이후 수시로 도시에 진동이 있었다. 그런 사전 징후가 베스비오 화산의 위험 신호이자 조기 경보가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화산 활동의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베스비오산 주변 도시에서 살았다.
상상할 수 있었던 일일까.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검은 구름이 베수비오 산 위로 피어올랐다. 서서히 검은 구름이 퍼지면서 해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와 바위가 비오듯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탈출해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있어야 할까. 사전 경고 없이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난 일.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파편들이 점차 쌓이기 시작해 순식간에 거리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붕이 무너졌다. 사람들을 매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베스비오산에서 가공할 화쇄난류(Pyroclasticsurge)는 뜨거운 가스 폭발의 힘으로 무섭게 돌진해 마지막 남은 영혼의 운명까지 잠들게 했다.
베스비오산은 활화산으로 지금도 활동 중이며 지금까지 50회 이상 크고 작은 폭발이 있었다. 위 사진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부석(Pumice)으로, 가장 최근의 폭발은 1944년에 있었다. 이 부석은 1944년 이전에 생긴 것으로 안내 표지판에 ‘Touch!’라고 표시된 견본으로 손으로 만져봤다. 이런 돌이 흉기가 되어 한 도시를 멸망시켰다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도표에서 붉은 삼각형 부분이 이탈리아의 주요 화산이다.) 폼페이우스의 베스비오산은 전형적인 성층 화산이며, 이런 종류의 화산은 중앙에 분출구가 있는 원추형이다. 성층 화산(Stratovolcano)은 용암이 매우 적게 흐른다. 반면 마그마가 축축하고 화산 내부에서 가스가 쌓여 매우 높은 가스 압력이 형성되기 때문에 갑작스럽고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화산 폭발은 바위와 재, 가스 기둥을 공기 중으로 분출시켜 그 구름 기둥이 대기 중에서 강력한 힘을 가질 때 최종적으로 땅에 떨어져 파편과 강한 가스를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화쇄난류(Pyroclasticsurge)라고 부른다.
로마 시대 이전 몇 세기 동안 베스비오 화산은 휴면 상태였고 비옥한 땅은 많은 사람을 그 지역으로 끌어들였지만 아무도 화산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1979년 화산이 폭발하자 화산재와 함께 가스와 파편이 하늘 20km 상공으로 치솟아 분출했고 거대한 화산재 구름의 낙하가 화쇄난류(Pyroclasticsurge)를 만들어 폼페이우스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다.
화산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화산폭발을 Vesuvian 또는 Plinian으로 표현한다. 플리니안은 로마 작가 플리니 더 영거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79년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자 참혹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Castofadog) 화산 폭발로 개가 죽고 완전히 부패해 재가 된 공간에 석회를 부어 만든 형상으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우스를 강타했을 때 집을 지키던 이 개는 목에 체인이 묶여 있는 채 숨졌다. 아쉽고 가슴이 아팠다.
폼페이 화산 전시회가 열리는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에는 약 200점의 발굴된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Castofadog>가 박물관 큐레이터 폴 데니스와 케이트 쿠퍼가 선정한 2위 전시품으로 목록에 올라 있었다.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 무기력하게 희생된 영혼의 수많은 귀중품이 잿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아름다운 금과 에메랄드 목걸이도 화산 폭발의 재 속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먼 훗날 누군가에 의해 분신과 같은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떻게 감지 못한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을까.
로마 시민들은 토가(Toga)를 입었다. 두꺼운 털로 만든 土屋는 공공행사나 종교행사 때 유니폼처럼 입었다. 토가는 로마 시민의 사회적 신분을 보여줬다. 이 조각상의 가슴 속에 금으로 만든 원형 불라(Bulla)라는 장식품이 있어 젊은이임을 보여준다.
(Bulla)
로마인들은 그들이 아끼는 조상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초상화를 만들어 기념했다. 조각상이 발견된 집주인의 조상 가이우스 코넬리우스 루푸스를 대리석에 조각한 초상화다.
그들의 삶이 존경받고 자신들의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로마인의 초상화는 대리석에 조각되어 청동상으로 만들어졌다. 또 모자이크나 그림으로도 그려져 있다. 공공장소와 가정에서도 초상화가 발견됐다. 그들은 조상을 잘 섬겼고 로마를 사랑한 사람들을 존경했다.
죽든 살았든 자신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기를 희망했다. 초상화 작업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부유층이 아니면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웠다. 비싼 자재로 많아도 초상화 작업에는 많은 숙련공이 투입돼 작업했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의상은 신분을 나타냈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옷을 입었다. 대리석 초상화의 여성은 로마 시민으로서 덕망이 있고 현모양처의 아내로 여사(Matrona)라고 불릴 정도로 우아하게 옷을 입은 모습이다. 무겁게 직선으로 자른 Stola를 얇고 가는 Tunica 위에 걸치고 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는 두 옷 위에 모직 망토인 Palla로 머리를 감쌌다.
로마의 초상화는 단순한 한 사람의 취향을 나타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또 자신의 개성과 사회적 신분, 그리고 때로는 로마 통치자들과의 가지려 했던 사회적 관계를 초상화로 표현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 후반기였던 기원전 90년경에는 다소 엄숙한 초상화가 대중적이었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의 이미지는 로마인의 덕과 평범한 생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60년 뒤 제국 시대 초기에 새로운 형태의 초상화 스타일이 등장했다. 로마 황제들이 주도한 초상화의 형태는 젊음, 남성스러움과 아름다움까지 갖춘 형태로 발전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년~서기 14년)의 부인이었던 리비아(Livia, 기원전 58년~서기 29년) 황후의 모습이다. 대리석에 우아하게 조각된 초상화 속에 제국 시대 왕비로서의 기운이 감돈다.
지위가 높음을 상징하듯 머리 위에 구슬로 감은 왕관을 쓰고 있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네로 황제의 치세 중에 인기가 있었다. 이 대리석 초상화는 50년에서 68년 사이에 조각되었다고 한다. 그의 턱과 입, 폭설 등 모든 형상은 AD 29년 숨진 리비아와 흡사하다는 평이다. 리비아는 87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로마의 초대 황제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년~서기 14년)는 죽은 후 신으로 추앙받았다.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로마 원로원에서 부여받은 아우구스투스. 그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 시대를 구가했다.
로마의 조세체계를 개선하고 육로교통망을 구축했다.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고 로마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했다. 로마의 도시들은 그를 제국주의 시대의 숭배의 대상으로 존경했다. 폼페이에는 적어도 두 개의 황제 숭배 센터가 있었다. 하나는 Forum 안에 있는 Temple of Vespasian으로 알려진 Temple of the Genius of Augutus였다.
죽기 전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남긴 아우구스투스의 왕위는 입양된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벽화로 토가를 곱게 차려입은 부자들이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빵을 나눠주는 모습이다. 정치선거 전후로 투표자의 호감을 얻거나 감사의 인사를 하는 일은 그 옛날에도 있었던 것 같다. 벽화는 폼페이(ペイ 壁画 H)의 House of the Baker
사회 지도자들은 사회적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잘 사는 사람들은 공공 복지 사업과 오락과 같은 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에 상당한 돈을 기부했다. 그 돈은 빌딩의 건축이나 보수, 또는 검투사의 경기 등에도 사용되었다.
로마의 모나리자일까. 한 귀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화려하다. 테세라(Tesserae)라는 작고 화려한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수수께끼처럼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유명한 귀부인을 그리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값비싼 보석과 우아한 옷은 그녀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도자 계급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자세히 보면 진주와 금 귀걸이를 차고 있으며 귀금속이 박힌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다.
드루사스(Nero Claudius Drus Germanicus, 기원전 38년 ~ 기원전 9년)는 로마 초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의붓아들로 미래의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동생이었다. 이 청동으로 만든 초상화로 그의 얼굴과 개성적인 헤어스타일은 아우구스투스의 용모와 많이 닮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줄리안 가문 출신이고 돌사스는 클라우디언 가문 출신으로 피가 서로 다른 혈통이었는데, 같은 집임을 보여주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드루사스의 친아버지는 티베리우스 네로이고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셋째 부인 리비아다. 리비아의 둘째 아들 드루사스는 자신이 닮으려 했던 장인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크게 인정받은 것 같다. 리비아는 도르수스를 임신 중이던 때 티베리우스 네로와 이혼하고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외조카인 소 안토니오와 결혼해 게르마니쿠스 리비아 클라우디우스 등 2남 1녀를 둔 드루사스. 그가 행군 중 낙마 사고로 숨진 뒤 아내 안토니오는 죽을 때까지 50년간 재혼하지 않았다.
드루사스는 로마제국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이자 3대 황제 칼리클라의 할아버지이자 5대 황제 네로의 증조부다.
꽤 강직해 보이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대리석에 새겨진 이미지로 보아 25년경에 새겨진 초상화로 보고 있다. 로마제국 초기에 조각된 초상화에서는 공화정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경심이라든가 힘들게 열심히 일하는 것, 그리고 로마에 대한 충성심 등이 초상화라는 조각 속에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나이가 든 사람은 성숙함과 삶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바람직한 자질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마키아(Edificio Eumachia) 로마 시대에 누구나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오늘과는 달랐다. 역사적으로 로마인에게 시민권은 매우 중요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엄격한 사회적 규칙이 있었지만 시민권은 다양한 계층에 맞게 취득할 수 있었다. 남성 시민들은 충분한 법적 투표권과 정해진 재정적 능력을 갖췄다면 정치를 위한 사무실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달랐다. 남성과 같은 조건의 자격을 가졌다고 해도 여성은 투표할 자격이 없었고 정치를 위한 사무실도 개설할 수 없었다.
노예도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본래 주인으로부터 해방된 자는 자유인이 되어 시민으로서의 많은 권리를 누렸다.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본래 주인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고 준수해야 할 정해진 의무가 있었다. 자유롭게 활동한 노예 중에는 폼페이우스로 큰 집을 소유해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여성이 투표를 하지 못해 공적인 일을 위한 사무실을 열지 못했더라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사업에서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종교생활에서 에마키아(Edificio Eumachia)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도 있었다.
에마키아는 폼페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이었다. 여사제로서 그녀의 대리석 초상화는 50년경 폼페이 모직 및 세탁 일을 하는 노동자 조합(Fullers Guild)의 헌신으로 만들어졌다. 대리석 조각상에는 ‘에마키아, 루시우스(Lucius)의 딸, 대중 여사제, from the fullers’라고 새겨져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를 숭배했다. 에마키아 조각상은 그녀의 비용으로 건축한 건물 안에 지어졌으며, 그 건물은 노동자 조합의 본부 건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에마키아는 누구일까. 궁금했다. 에마키아의 재력과 높은 사회적 지위는 오래된 폼페이 가문과의 영향력 있는 결혼과 그녀 자신의 가족 관계, 그리고 타고난 사업적 수완에서 형성됐다. 그녀는 자신의 비용으로 시빅포럼 옆에 큰 빌딩을 건축해 시장, 예배 장소, 노동자조합 본부 건물로 사용했다. 에마키아는 여성 사제로서 아우구스투스의 신성화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 사제였다.
Perpetual Dictator로 새겨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화가 새겨진 동전) BC91988년 폼페이우스는 Social Wars 기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며 로마에 대항했지만 로마의 장군 술라(Lucius Cornelius Sola Fedlix기원전 138년기원전 78년)가 폼페이우스를 점령하게 된다. BC8180년 술라는 병사들과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폼페이우스에 정착했고 폼페이우스는 곧바로 완전한 로마의 도시가 됐다.
BC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100~BC44)는 원로원에 의해 로마 세계를 호령하는 영원한 독재자가 되지만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해방군(Liberators)’에게 암살하도록 주문했다.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BC32~31년 치열한 권력투쟁이 나타났는데, 카이사르가 입양한 후계자 옥타비누스는 그의 마지막 라이벌 마크 안토니(Mark Antony)를 Actium 해전에서 패퇴시키게 된다.
BC27AD14년 승리한 옥타비누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조의 초대 황제로 통치한다.
화산 폭발에 대한 사전 경고는 이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에서 내려온 줄리오클라우디안 황제 시절의 마지막 황제 네로가 통치하던 시절이었던 62년 폼페이우스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네로는 황제가 된 지 2년 만에 스스로 나폴리에서 지진을 겪기도 했다.
68~69년 사이에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시민 전쟁이 벌어지면서 갈바, 오쏘, 비텔리우스, 그리고 베스파시안 4명의 황제가 바뀌는 숨 막히는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역사적인 79년 제10대 로마 황제 티투스(Titus)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였다. 화산이 폭발하자 티투스는 폼페이와 주변 지역 구조 대책을 세우기 위해 캄파니아로 달려갔다.
인상적인 청동 투구는 중무장한 물마로(Murmillo) 검투사가 착용했다. 꼭대기에 뿔이 나 뾰족한 모습과 넓은 눈가리개와 얼굴 보호대가 독특해 보이며 투구를 장식한 그림 하나하나에서 예술적 감각이 풍긴다.
폼페이에는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두 도시의 집행관이었던 C. Quinctius Valgus와 Marcus Porcius가 돈을 주고 세운 것으로 혈전을 벌이는 검투사들의 경기와 맹수들의 경기가 연중 펼쳐졌고, 많은 구경꾼들이 긴장감 넘치는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원형 경기장에 모였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대개 죄수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자, 노예였으며, 간혹 전문적인 선수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이 행사들은 스포츠 이벤트 에이전트가 흥행을 주선했다. 당시 로마의 스포츠 경기장에서도 경쟁상태팀 응원단 사이에 패퇴와 소동이 있었다. 경기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훌리건이즘은 새삼스러운 것 같다.
59년도에 원형 경기장에서 대폭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불상사였다. 네로 황제는 10년간 검투사의 경기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폼페이 응원단과 노세란에서 원정 온 응원단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 모습을 그린 벽화가 폼페이 한 가정에서 발견됐다. 벽화를 보면 응원단 간의 싸움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폼페이 원형 경기장)
적갈색으로 과장해 표현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조각상은 남자들로 구성된 한 쌍의 배우로 극장 인근 개인정원 입구에서 발견됐다. 조각상은 the Youth and the Female Courtesan이라는 로마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특색 있는 초상화다.
폼페이 시민들은 영화를 사랑했던 것 같다. 로마가 하나의 영구적이고 큰 극장을 갖기 전에 폼페이에는 이미 두 개의 극장이 있었다. 야외 개방형의 전통적인 큰 극장은 5천 명이 앉을 수 있었고, 새로 지붕을 디자인한 극장(Odeum)은 거의 2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 폼페이 인구 1만 2천 명을 생각하면 대규모 시설이었다.
배우들은 코미디와 비극적인 이야기, 무언의 광대극 등을 로마어와 그리스어로 공연한, 인기가 많았던 특별한 배우들은 이미 팬클럽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낙서로 표현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하니 예술과 문화면에서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는지를 알 수 있다.
BC 100년 전 모자이크 벽화에서 무대 탈을 쓰고 생음악을 연주하는 거리 뮤지션 일당이 좁은 길가에서 연주하고 있다. 이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탬버린, 심벌즈, 그리고 Tibiae라는 이중 파이프다.
폼페이 사람들은 오늘처럼 음악을 매우 즐겼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회 행사에는 음악이 따랐다. 종교행사에 음악이 있고 장례와 승리 기념식 행사 등 공공행사에 음악이 연주됐다. 원형경기장 운동경기나 극장에서도 음악을 연주하고 저녁 한가한 시간에도 음악을 즐겼다. 로마 음악가들은 목관악기, 금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조각된 벽화에서 뮤지션들은 Tibiae라는 이중 파이프와 탬버린을 연주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무대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그림은 폼페이 정원을 그리고 있다. 배우들이 전형적인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왼쪽은 우스꽝스러운 연극에서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고 오른쪽은 비극적인 공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폼페이우스는 드라마처럼 극적인 장면을 수많은 벽화로 그려 역사에 남겼다. 벽화에서 한 배우가 두 여자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노예역 연기를 하고 있다.
폼페이우스에 있는 고대 이집트 풍요의 대모신 이시스의 신전으로 원형극장(Large Theatre) 뒤에 있다. 이 신전은 실질적으로 79년도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당시에 운영되고 있었다. 불에 탄 제물의 잔해가 제단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BC1세기 후반의 놀라운 벽화는 두 대의 로마 군함이 활 모양으로 만들어진 무기고 안에 정박해 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큰 눈이 안경테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아마 큰 눈동자의 눈을 부적으로 그려놓고 항해 중 악마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각각의 군함은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인 Batteringram으로 부장하고 있었다.
BC31년 옥타비우스가 그의 마지막 라이벌인 Mark Antony를 Actium 전투에서 패배시킨 뒤 이들 배는 해군 전투에서 사용되지 않았고 로마인들은 해적들로부터 지중해 항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사용했다.
폼페이우스는 경제활동으로 사람들로 붐비는 상업도시였다. 사르노 강 어귀에 있는 폼페이우스는 그 지역의 주요 항구 역할을 했다. 수입 물품의 도착항으로서 강을 따라 내륙 지역까지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고, 지역 내 소비나 해외로 물품을 수출하기 위해 사르노 강을 따라 물품을 폼페이우스로 수송할 수 있었다. 와인 올리브오일 과일 채소 밀 등이 그렇게 운반됐다. 당시 폼페이 항구가 어디였는지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한다.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화산과 지진과 많은 역사를 겪은 그 옛 폼페이 항구는 어디였을까.
(폼페이 상류사회의 화려한 집을 그린 벽화) 평범한 벽과 거리의 상점이 있는 곳과는 달리 마당이 딸린 부유하고 전통적인 집은 매우 정교하고 화려했다.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은 집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 자신의 집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교적인 교류를 했다.
아트리움 중앙에는 빗물로 가득 찬 개방된 물반(물반, impluvium)이 있다. 사진 건물은 폼페이우스의 House of Menander에 있다.
폼페이우스에 살던 사람들에게 집을 지키는 개는 아트리움에 있는 바닥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그림의 주제였다. 종종 거기에 개조심(Cave Canem)이라는 경고 문구를 넣기도 했다. 사진의 모자이크는 House of Orpheus에서 발견되었다. 앞부분 ‘Castofadog’ 같은 집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그림이다.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려는 조짐이 있었을 때 개들은 아마 이상한 징후를 감지하고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과학자들은 긴박한 위험이 다가오는 순간 동물이 인간보다 먼저 변화를 빨리 인지한다고 한다.
폼페이 사람들은 생선을 즐겨 먹었다. 물고기는 주로 나폴리만에서 잡힌 것이었으나 큰 연못에서 특별히 양식한 경우도 있었다. 바닥에 물고기 그림으로 모자이크한 이것은 정원의 연못이 있는 집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연못에는 물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다양한 색의 테세라 불리는 작은 돌조각으로 정교하게 만든 모자이크 그림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뱀장어, 조개, 오징어, 문어와 싸우고 있는 바닷가재까지. 왼쪽을 보면 바위 같은 암초 위에 물총새(Kingfisher) 한 마리가 바닷속 풍경을 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천장에 부착된 벽화는 화산 폭발로 강하게 떨어지는 부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폼페이 사람들은 천장을 튼튼하고 빛나는 격자 모양의 여러 패널을 들고 우물의 반각형 우물 사이로 장식했다.
아마도 전시된 벽화 중 가장 오래된 벽화 같았다. 1979년 화산 폭발 당시 이미 100년이 넘은 벽화였다. 벽화 조각에 나타난 장식 스타일을 보고 그린 시대를 추정하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한 마리의 새가 화려한 대리석 슬래브로 만든 벽 앞에 서 있는 모습이 페인트로 그려져 있고, 그 위에 회반죽을 한 모습이 보인다.
2000년 동안 벽화는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되었을까. 화산재 밑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와인잔-Cantharus) 담쟁이덩굴 잎과 덩굴 손으로 정교하게 만든 은 와인잔은 부자들이 원하던 컬렉션 중 최고였다. 3개의 소파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Triclinium’이라고 불리는 주방 의자에 앉아 폼페이 사람들은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물컵
고급스러운 청동 제품의 모양을 본뜬 유리 물병
세련된 금목걸이 금구로 뱀 머리 모양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작은 형태의 크기로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부적처럼 체인에 걸려 있다. 그는 왼손에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뿔(cornucopia)을 들고 오른손에는 세계의 운명을 이끄는 열쇠(rudder)를 쥐고 있다.
금목걸이 끝에 달린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
은거울은 부유한 폼페이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반사되는 면은 잘 빛나고 가운데 높은 부침을 새겨 두 큐피드가 낚시를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하나는 그물을 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바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거울 손잡이가 두 개로 되어 있다.
(은거울의 중앙 부분)
나선형 뱀 모양의 금 브레슬릿은 폼페이 파괴 이전인 로마 시대에 매우 유행했다. 뱀은 악마를 쫓아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되었다. 이들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 술의 신 박쿠스(Bacchus),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게도 바쳐졌다.
자수정(Amethysts)이 박힌 금귀걸이 세트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노란 촉수와 바다 버스는 물고기 음식으로는 최고로 비쌌다. 갑오징어와 대합이 중간 암초 위에 보인다. 노란 촉수는 웬만한 가정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맛이 환상적이었다고 한다. 한 로마 작가가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커다란 노란 촉수 3마리가 3만 세스테르티우스(sesterces)에게 팔렸다고 할 정도로 비쌌다.
BC23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화폐개혁을 단행한 후 로마의 화폐는 금, 은, 놋쇠와 동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은 고가의 거래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주로 부의 축적에 사용되었다. 물건을 사는 구매자는 은화로 결제하고 일상생활의 작은 물품 구매 거래에는 놋쇠와 동전을 사용했다. 일반적인 회계에서 급여, 음식, 일상적인 필수품은 놋쇠 동전(brasscoin),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에 기준을 두고 계산했다.
(Garden Fresco) 정원은 전형적인 폼페이 사람들의 집에서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은 정원이 보이는 방이었다. 그만큼 정원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벽에 실제 정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벽화를 그렸다. 이 벽화를 보면 공작과 비둘기와 조각한 대리석 장식판이 자연이 우거진 숲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다.
(징검다리 사이로 마차가 지나가고 마차가 지나간 바퀴 자국이 파여 있다.) 로마시대의 도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오늘날보다 더 잘 만들어진 것 같다. 큰 돌을 견고하게 주춧돌로 삼아 길을 만들었고, 이들 도로는 로마 제국 전체에 걸쳐 건설되었다. 도로는 로마가 세계의 먼 지역까지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는 데 직접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폼페이에서도 주요 도로에는 높은 연석을 설치했다. 보행자가 다니는 교차로에는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았고, 사이로 마차가 지나갔다.
돌고래 입을 분수 물이 나오는 입으로 조각한 대리석 분수이다. 돌고래가 아이를 감싸고 있고 아이가 한 손으로는 돌고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은 돌고래 꼬리 위에 있다.
이 대리석 항아리는 로마인들이 그리스 예술을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재창조했는지를 보여준다. 원래 이 용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연회(Symposia) 때 물을 섞은 와인을 담는 데 쓰는 클라텔(Krater)이다. 같은 디자인을 폼페이 인근 휴양지인 스타비아에 있는 고급 빌라 정원에서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발견됐다. 조각된 장식부터 술신 박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In the Heat of the Moment) 화산이 폭발하는 동안 뜨거운 열에 녹아 변형된 유리병의 모습으로 직접적인 화쇄 난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로마의 유리병은 보통 섭씨 800도에서 1000도 사이에 녹지만 고고학자와 지질학자들은 폼페이우스를 덮친 화쇄 난류 온도는 섭씨 300도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의 유리 용기는 기름 램프가 전복되면서 발생한 화재 등으로 더욱 강력한 열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견된 금속제 스토브, 발견했을 때 안에 타다 남은 숯이 가득 차 있었다.화산 폭발 시기는 8월 24일이 아니라 가을이 아니었을까. 베스비오 화산이 여름철 높은 기온이 이어지는 8월에 폭발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결정적 증거가 있다. 그것은 많은 이동용 금속제 난로가 발견되었는데, 난로 안에는 타다 남은 숯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당시 폼페이 가정에서는 난방 재료로 목탄을 사용했고 화산 폭발 당시 숯이 가득 찬 난로가 많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화산은 기온이 차가운 가을에 폭발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옛날에는 화산재나 독성 가스에 의해 질식할 경우 사람은 몇 분 안에 죽는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지구과학자들은 화쇄난류와 같은 섭씨 300도에 달하는 심각한 열이 발생할 경우 즉시 즉사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캐스트(cast)를 보면 살아있는 자세 그대로를 보이고 있으며, 죽은 후 열이 사람의 근육을 축소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복서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태로 발견된 경우도 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할 당시 약 1만2000명이 폼페이에서 살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1150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머지 영혼들도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바다로 탈출하려는 희망을 품고 달려온 폼페이항을 포함해 3분의 1의 도시는 아직 미발굴 상태에 있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폼페이 주변의 전원 마을이 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많은 사람이 탈출한 것도 분명하다.
(1863년 2월 발견된 The sickman-Ammalato) 캐스트의 얼굴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평온하고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다. Via Stabiana에서 발견되었다. 약해 보이는 수동적인 표정에서 ‘아픈 사람'(Ammalato)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고학자 Giuseppe Fiorelli는 그가 다른 캐스트들처럼 무서운 공포와 고뇌를 갖지 않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설명했다. 1873년 6월 발견된 그는 Fiorelli에 의해 만들어진 7번째 캐스트였다.
1863년 2월 5일 폼페이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인부가 땅에서 해골 유골이 담겨 있는 공간을 발견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의 총괄책임자였던 Gluseppe Fiorelli는 공간 속에 액체 상태의 회반죽을 쏟아부을 생각을 했다. 회반죽이 마른 뒤 땅에서 단단한 형태의 틀을 제거하고 재를 털어내자 죽음을 맞은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남자의 캐스팅을 볼 수 있었다.
이후 화산 폭발로 숨진 사람들의 캐스팅을 약 100개 정도 만들었고, 파이어리는 이들을 “베스비오에 의해 만들어진 시체”라고 가슴 아프게 묘사했다.
(Golden Bracelet의 가족) 두 명의 어른과 두 명의 자녀를 둔 네 명의 캐스트 그룹은 House of the Golden Bracelet에서 필사적으로 피난처를 찾았을 슬픈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계단 난간 아래에서 피난처를 찾으려고 할 때 갑자기 뜨거운 가스와 화쇄 난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팔이 얼굴 쪽으로 휘어져 있다. 죽은 후 심한 열이 근육의 힘줄을 수축시켰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족이었다. 금 40aurei와 은 173denari가 인근에서 발견됐다. 여자는 손에 무거운 팔찌를 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의 이름을 House of the Golden Bracelet이라고 부른다.
1974년에 발견되어 그해 캐스팅이 만들어졌다.
지각을 구성하는 단단한 암석층 중 하나인 플레이트(Plate)를 나타내는 도표이다. 아드리아 해 아래에서 아프리카 판이 티레니아해의 유라시아 판 아래로 들어가 충돌을 일으킨 지점에서 Slab Windows가 생기고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베스비오 화산 폭발로 화산재의 검은 구름 기둥이 남동쪽으로 부는 바람의 영향을 직접 받아 폼페이우스를 덮쳤다. 회색 부분의 농도가 짙을수록 화산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79년도. 아름다운 나폴리만의 조용한 도시 폼페이. 베스비오산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검은 구름이 솟아올랐다. 시내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근거리. 검은 구름이 천하를 뒤덮었고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왔다. 그리고 화산재와 함께 부석이 시속 100km의 속도로 비오듯 내리기 시작했다. 화산 파편이 시간당 15cm씩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때는 탈출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마침 저녁이 다가왔다. 화산재와 부석이 이미 1m 이상 쌓여 있다. 부석이 급속히 쌓이기 시작하면서 가옥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이 깔려 묻히기 시작했다. 탈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탈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시간이 된, 총 발굴자 중 이때 숨진 사람이 3분의 1이었다.
다음날 아침 화산재와 부석이 4m 이상 쌓였고 화산 폭발로 인한 구름 기둥이 심각했다. 시간당 17cm씩 쌓이기 시작한 상태에서 탈출은 전혀 불가능했다. 이때 사망자가 발굴자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현재의 딜레마는 발굴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에 있다. 200년 넘게 진지한 고고학적 발굴을 했지만 3분의 1 정도는 아직 미발굴 상태이기 때문이다.
베스비오 화산 폭발 전 폼페이 주변 지역은 비옥한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옥한 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땅 위에 대규모 농장을 짓고 평화롭게 살았다. 땅은 그들에게 부의 원천이었다. 나폴리 만으로 흐르는 살노 강을 따라 폼페이 사람들은 음악과 그림, 예술을 사랑하고 즐겼다. 음악은 그들의 일상이었고 거리에는 음악이 있었다. 강을 따라 바다에 접근하기 쉬웠던 교역이 활발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Pompein the Shadow of the Volcano 전시회를 둘러보며 세월의 혼돈을 느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 아니라 오늘, 어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거는 지나가는 게 아니라 새롭게 다가오듯 그 아득한 옛 폼페이우스가 눈앞에 선명하게 다가왔다.
가슴에 딸을 안고 숨진 어머니와 딸 캐스트(Cast) 앞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구원을 요청하는 지친 표정으로 그들은 그렇게 조용히 잠이 들었다.